많은 목회자들이 설교를 한다. 이 설교는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거나, 교인들에 힘을 주는 영적인 원리를 가르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설교란 무엇일까라는 문제에 대한 정의는 여러가지지만 근본적으로 설교에 대해서 강조되고 매번 인식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목회자들을 대언자, 사자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종이라는 표현도 쓴다.
또 설교시간 전에 기도할때 목회자 스스로와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잘 대언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오직 주님께서 말씀하시옵고, 부족한 종은 전하게만 해달라는 기도도 한다. 내가 다닌 신학교에서는 '성언운반일념'이라는 십자가 목걸이를 설교학을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달고 다니게 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매우 복잡한 문제가 있다. 설교를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시간으로 인식하는 것이 과연 실 예배에서 교회에서 그렇게 생각되어지거나 혹은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보통 평상시의 예배 가운데 과연 30분간 전해지는 말씀을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지고 있는가? 여기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은 매우 많다.
설교시간이 길다고 흥분하거나 시간을 줄이자는 성도들의 태도는 감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을 그렇게 말할수 있는가 하는 문제앞에 서게 된다. 평신도도 인식할 정도의 목회자의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잘못이해하실수 있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과연 들어졌는지에 대해서 생각케 한다. 예언자적인 선포등이 아무런 결과를 못나타내거나, 잘못된 결과를 가져왔을 경우에는 더더욱 심각한 경우이다.
특별히 설교자들이 가질수 있는 유혹 중의 하나는, 설교시간에 어떤 사항에 대해서 확정적인 말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교회내에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의 해결이 하나님의 말씀을 빗대어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던가, 이렇게 될것이다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는 목회자에게 부여된 영적이고 교회적인 권위때문에 발생할수 있는 유혹인데, 평신도 중의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도 닥쳐올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목회자가 선지자의 역할과 예언자의 역할과, 제사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맞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앞에 서 있는 사람이거나, 영적이고 신통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사람이라도 예언을 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보여주시거나 들려주신 말씀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습관적인 은혜 받은 것에 기초해 똑같은 것을 다른 상황가운데서 하나님의 예언으로 선포하거나, 심령에 무언가 그럴듯한 느낌에 의존해서 예언을 해서는 절대 안된다.
에스겔이 전하는 말씀은 이런 뜻에서 분명하게 적용된다.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에 따라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기나긴 포로생활을 예언했을때에도, 하나냐라는 거짓 선지자는 2년내에 다시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당시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희망을 던져주는 그의 메시지에 속아 넘어갔다.
모세가 바위를 향하여 명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뒤로한채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 주셨던 방법 그대로 바위를 치며 담대하게 선포하였을때 능력은 나타났지만, 그는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사람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은사 받은 성도들도 목회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 이런 유혹을 물리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느낌이나 그러할 것이라는 추측에 의지하여 말씀을 전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사가 확실한 것처럼, 하나님의 메시지도 확실할 것이다. 예언은 더더욱 확실하게 나타날 것이다. 본 것 없이 심령에 의지해서 전하려는 유혹을 피해야 한다. 교회에 도움을 주는 방법은 오히려, 성경에서의 예언과 같은 의미로 시대사회적인 의미에서 정확한 성경 풀이로 적절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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