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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자료 Data/조직신학

기독교 사상사를 통해 본 악의 문제

by 길목 2003. 2. 6.
김승철/부산신학교 교수

Ⅰ. 여는말
기독교 신앙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고백이기에 그 중심은 세상의 구원에 놓여져 있다. 그래서 기독교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인간이 되셔서 세상으로 오신 분이며 또 구원자 그리스도는 신성과 함께 인성을 지닌 존재로 고백된다. 따라서 이때 구원은 인간과 세상이 현실적으로 처해있는 상황에 대한 이해와 맞물려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악의 문제가 논의되는 장소는 바로 여기이다. 즉 악의 문제는 인간과 세상의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이상과 동전의 앞뒷면을 이루는 문제이다. 비록 악에 대한 접근이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형태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근본적인 동기는 세상과 인간의 구원이라는 데에 있다.
특히 서구사상이 근대로 접어들면서 모든 사유의 중심을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인간중심적이고 역사중심적인 사유로 전환되면서 신학도 이 “인간학적인 전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전개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악 죄 타락 등 인간의 이른바 “타락상태(status corruptionis)"에 대한 논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자연과학적인―특히 생물학적인―연구와 이에 의존하고 있는 철학적 인간학과의 연계성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분야에서 논의되었던 인간의 무흠한 상태(status integritatis), 타락상태(status corruptionis), 원죄(peccatum primum), 행위에 의한 죄(paccatum actuale), 의지의 자유문제(liberum abitrium)등은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문화인류학적 연구와 동떨어진 채 이야기될 경우 그것이 관심을 기울이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멀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악의 문제는 철저하게 인간학적 관심사 속에서 논구(論究)되어야 한다. 그 까닭은 기독교 신학이 논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인간이 처해있는 현실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며 악은 이 현실적 상황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악에 대한 문제가 이처럼 인간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항이지만 기독교 사상사 속에서 악은 여러가지 맥락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논의되어왔다. 그것은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피조물인 이 세계에 어째서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으로 표현되면서 신의 존재와 본질을 묻는 형이상학적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 물음은 하나님은 어째서 선한 사람이 악의 고통을 받도록 내버려 두시는가라는, 「욥기」로 대표되는 신정론(Theodizee)의 물음으로 첨예화된다. 또한 때로는 악의 문제는 인간의 내면성 깊은 곳에 있는 것으로써, 즉 인간의 본질자체와 연관되어서 논의된다. 그리고 악은 인간 개개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라는 측면에서 거론되면서 그 극복의 길이 모색되어진다. 이처럼 악의 문제는 우주론적―존재론적으로 실존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다양하게 논의될 수 있는 주제이다.
그뿐만 아니라 악은 여러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즉 악은 시대를 달리해오면서 다양한 의미와 맥락 속에서 여러가지 모습으로 표상되었다. 악은 예수 시대에는 율법을 범하는 것과 사악한 충동으로 또는 로마에 의한 이스라엘지배로 표상되었다. 또 후에는 이 세상의 무상함 성적 욕망을 지닌 육체 등이 악의 상징이 되었다. 국가세력에 의한 우상숭배강요가 적그리스도의 표징이 되기도 하였다. 역으로 기존의 교회적 질서를 위협하는 세력들 예를 들어서 중세의 이단자들 혁명가들 등이 악을 상징한다고 여겨지기도 하였다. 이른바 마귀들린자들 마녀들도 악의 화신으로서 박해를 받았으며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사탄과 마귀등의 모습으로 상징화되었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히틀러나 아우슈비츠수용소 스탈린의 독재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등도 악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인 악이해는 당연히 신학에도 영향을 미쳤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본 연구는 이제 기독교사상사에 등장하였던 대표적인 악이해를 살펴보고 그것들이 지닌 본질적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어거스틴의 악이해
기독교 신학이 악의 문제와 관련해서 전통적으로 던져왔던 신정론적 물음은 이미 고대 철학에 있어서도 제기되었다. 에피쿠로스(341-270)는 신의 존재를 반박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고전적인 난제를 제기하였다.

신은 악을 제거하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든지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있으나 원치 않든지 아니면 악은 제거하기를 원치 않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든지 그것도 아니면 신은 악을 원하고 또 그것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신에 대한 딜레마를 제기하였던 에피쿠로스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는 연약한 신이나 오류를 범하는 신을 원치 않았으며 따라서 악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거부한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이와 같은 문제설정은 과정신학자 그리핀(David Ray Griffin)에 의한 다음과 같은 테제(These)로 정형화될 수 있다.

1. 신은 완전한 실재(a perfect reality)이다.(정의)
2. (정의에 따르면) 완전한 실재는 전능한 존재(an omnipotent being)이다.
3. (정의에 따르면) 전능한 존재는 어떤 본질적인 악이 없는 실제적인 세계를 일방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4. (정의에 따르면) 완전한 실재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a morally perfect being)이다.
5. (정의에 따르면)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는 어떤 본질적인 악이 없는 실제적인 세계를 만들어 내려고 원할 수 있다.
6. 만일 이 세계에 본질적인 악이 존재한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1과 5로 부터의 논리적인 추론)
7. 그런데 세계에는 본질적인 악이 존재한다.(사실적 진술)
8. 따라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6과 7로 부터의 논리적인 추론)

따라서 악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이 고백하고 있는 전지전능한 창조주 하나님사상과 논리적으로 정면충돌을 일으키는 문제로써 부각된다. 그리하여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도덕적 악이나 자연적 악은 바로 형이상학적인 악의 문제로 확대되어서 그것이 신의 존재 문제와 연관성을 지니게 된다. 이 형이상학적 악(metaphysical evil)의 문제를 주로 취급했던 것이 어거스틴의 신정론인데 이는 피조물이 지니는 유한성과 관계된 악의 논의이다.
교회사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어거스틴의 신정론은 종교철학자 존 힉(John Hick)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의 의미의 실마리를 과거에서 찾는다.” 즉 어거스틴은 모든 악은 죄이거나 또는 죄에 대한 벌로써 내려진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인류 전체는 원죄의 결과로 병에 걸리고 죽음에 이른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악의 근원을 과거 인류의 타락에서 찾는 사고방식이다.
418년에 카르타고에서 열렸던 교회회의는 펠라기우스(pelagius)에 반대하면서 인간은 처음에는 무흠한 상태로 창조되었으나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했음을 명기하였다. “아담의 타락 속에서 모든 인간은 그의 근원적인 능력과 무흠함을 상실하였다. 그래서 만일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총이 그에게 내려지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이 타락의 심연으로부터 올라올 수 없다.” 카르타고회의의 이와 같은 주장은 529년의 제 2차 오랑쥐(Orange) 교회 회의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타락은 아담에게만 해당되며 그의 후손들에게는 해악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하거나 또는 죄에 대한 벌인 육체적인 죽음만이 한 사람에 의해서 모든 인류에게 퍼져나간 것이고 영혼의 죽임인 죄 자체는 그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불의하다고 일컬어진다…”
이와 같은 어거스틴적인 이론의 핵심은 타락이라는 관념에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완전한 선이었던 이 세계에 무엇인가? 잘못이 저질러졌다고 보는 관점이다. 악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 내부에 생긴 잘못과 이탈과 무질서를 의미한다. 따라서 악은 그 자체로서 어떠한 적극적인 존재 이유를 갖고있지 못하며 그것은 원래 무엇인가? 가지고 있었던 것 또는 정당하게 가지고 있어야 하는 선함의 상실 또는 결여 부재일 수밖에 없다.
어거스틴은 초기에 마니교의 선, 악의 이원론과 거기에서 귀결되는 악의 결정론에 몰두하였다. 그는 대화체로 되어있는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에서 이 사실을 밝히면서 자신이 신의 문제와 악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에보디우스(Evodius) :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악의 근원입니까 아닙니까? 우리가 어째서 악을 행하게 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어거스틴 : 그것이 바로 내가 젊었을 때 내게 커다란 고민을 안겨준 문제였습니다. 그 문제로 괴로워하다가 나는 이단의 팔 안으로 끌려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한 분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근원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을 괴롭히는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만일 죄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혼에서 비롯된다면 그리고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은 최소한 간접적으로나마 죄에 대한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악의 존재와 하나님의 창조사이에 이와 같은 딜레마를 어거스틴은 악과 죄는 완전한 본성으로부터의 결핍을 의미하며 따라서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결핍으로써 악을 찾아내는 일은 순수한 상태가 지닌 본성 즉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에 대한 찬송과 동일한 일이라고 봄으로써 마니교적인 선, 악의 이원론에 빠지지 않고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악은 그 자체로서 존재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악은 “본성의 완전함을 결여한 어떤 것”일 뿐이다.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악의 문제가 지닌 딜레마를 벗어나도록 해주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us)와의 만남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플로티누스(plotinus, 204-270)로 대표되는 신플라톤주의는 존재는 궁극적 일자(一者)로부터 유출되었다고 주장한다. 존재성에도 충만되어 있는 그 궁극적 일자는 스스로 존재를 유출시켜서 모든 사물이 거기서부터 단계적으로 비롯된다. 이것은 마치 밝음으로 가득차있는 태양에서 빛이 흘러넘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태양에서 나온 빛이 태양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희미해져 가듯이 궁극적 일자로부터 단계적으로 멀어질수록 궁극적 일자의 존재성과 충일성은 희미해져서 결국에는 비존재에까지 이르게 된다. 신플라톤주의에 있어서 악은 이처럼 궁극적 일자로부터의 유출과정에서 비롯된 최후의 것 즉 궁극적 일자로부터 단계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것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은 이와 같은 신플라톤주의로부터 악은 곧 결핍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였지만 존재의 각 단계가 자기가 거기서부터 비롯된 궁극적 일자에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사이의 절대적인 차이를 말하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사상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악은 존재론적으로 비존재이고 선의 결핍(privatio boni)이다. 이것은 어거스틴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다'고 보고 악을 비존재(nihil)의 영역에 놓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마니교적인 선·악의 결정론적 이원론은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설을 거쳐서 기독교적인 '무로부터의 창조'사상과 만나면서 '악=선의 결핍' 이라는 어거스틴의 주장이 형성된다. 이로써 “악이란 무엇이며 어디로조차 이리로 스며든 것이냐 그 뿌럭지, 그 씨알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본디 아주 없는 것이냐”는 어거스틴의 심각한 물음은 일단은 대답이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이러한 악의 문제에 대한 대답은 단순히 악의 근원에 대한 사변적인 물음이 될 수는 없다. 즉 세상이 선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는데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때 그는 아직도 하나님이 만든 이 세계를 자기에게서 떼어놓고 자기 밖에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악의 문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대답될 수도 해결될 수도 없다는 사실은 어거스틴이 만년인 67세때(421년)에 저술했던 엔키리디온(Enchiridion)에 나오는 “하나님은 악까지도 선용하실 만큼 전능하시고 선한 분이다.”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그가 젊은 시절에 썼던 자유의지론의 서두에서 제기했던 물음 즉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선하다는 것은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가?”라는 물음을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인정하고서 현실적으로 악이 존재함을 시인한 것이다.
악의 문제는 그의 존재여부를 형이상학적으로 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악과 스스로 악이라고 자각한 종교적인 주체가 어떻게 거기로부터 벗어나느냐가 관건이 되는 그러한 문제라는 것을 어거스틴은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악의 존재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모순이 되느냐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 악까지도 선용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구속론적 관점이 악의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어거스틴은 말해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어거스틴의 악이해의 핵심은 악한 종교적 주체인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는다는 실존적인 측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무래도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고백론 1:10)는 고백과 “실로 우리가 당신한테서 멀리 있을 제라도 당신 전능은 우리에게서 멀지 않으심이니이다.”(2:2)는 고백은 악에 대한 형이상학적 접근이나 악의 근원을 둘러싼 자유의지문제의 논의보다 앞서있는 근원적인 종교적 자각이라고 할 수 있다.

Ⅲ. 어거스틴적 신정론의 영향과 문제점
악의 문제에 대해서 기독교사상사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어거스틴의 악이해는 그러나 방금 말했던 바와 같은 구속론적 관점에서보다는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수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선하며 악은 그 선성의 결핍이며 악은 선한 이지적 피조물인 인간에 의해서 그의 도덕적 자유가 방탕한 곳으로 오용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악은 인간의 타락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악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위협받거나 방해받는 일은 업다는 논리적인 문제로써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적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전체를 바라보면 세계는 죄와 괴로움을 내포하면서도 완전한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으로 대표되는 서구 기독교사상의 악과 죄이해는 스콜라철학의 지배에 있던 중세 가톨릭교회에서 계승, 발전되었다. 중세신학의 완성자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어거스틴이 말하였던 악의 존재론적 비존재성을 신의 속성에서부터 대답하고자 하였다. 즉 아퀴나스에 따르면 신성은 과정(process)을 전혀 지닐 수 없는 단순성이므로 신에게는 변화가 불가능하기에 거기에는 영원한 본질과 변화하는 본질의 현실화 사이에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아퀴나스는 악의 근원을 어거스틴처럼 자유의지를 지닌 피조물에게서 찾지 아니하고 우연성이라는 피조물의 속성에서 보았다. 그리고 악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신의 전체적인 예견 속에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은 보편적으로 모든 존재자들을 돌보시기 때문에 어떤 특수한 효과를 지닌 몇몇 결점을 허락하는 것은 그분의 섭리에 속한다. 또 우주의 완전한 선은 그렇게 된다고 해서 제약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계에는 보다 선한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 어거스틴 전통에서 나온 죄와 악이해를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아우구스부르트 고백신조(Confessio Alugustana)는 원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모든 사람들은 죄 중에 잉태되고 출생되었다. 즉 그들 모두는 태속에서부터 사악한 욕망과 성질로 가득차 있어서 본래부터 하나님에 대한 참된 경외나 신앙은 전혀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도 죄는 아담의 타락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운명적인 것으로 고백된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시대의 뒤를 이은 정통주의 신학에서도 반복되었다.
예를 들어 게르하르트(Johan Gerhard)는 원죄를 인간본성의 부패라고 보면서 “이 부패는 최초의 조상의 타락에서 비롯되었고 육체적인 출생을 통하여 후손에게 전달된다.”라고 보았다. 그러나 죄와 악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계몽주의신학에 와서 날카로운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계몽주의신학의 원죄에 대한 관념은 인간의 도덕심을 마비시킨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운명론적으로 이해된 원죄사상은 실질적인 의미에서 죄에 대한 책임을 인간에게 물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결단한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 죄는 초인격적인 어떤 실체가 아니라 인간과 관계된 인격적인 개념이 되었다.
어거스틴의 '선의 결핍'으로써 악이라는 생각은 20세기 초의 이른바 변증법적 신학의 기수였던 칼 바르트(Karl Barth)에게서도 드러난다. 바르트는 “하나님과 아무것도 아닌 것(Gott und das Nichtige)"라는 제목하에서 악의 문제를 다룬다 그가 악을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부른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르트에게 있어서 악은 오직 “신의 분노의 대상(opus dienum dei)"이 될 뿐 “실체없는 껍데기(substanzloses Schein)"에 불과하다. 따라서 악은 오직 하나님이 무엇이 아닌지를 부정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줄 뿐이다. 그러나 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서의 악도 역시 하나님께서 고려하고 계신 어떤 것이라고 바르트는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신의 전체적인 섭리속에서 악의 위치를 보려는 어거스틴 전통을 읽을 수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 악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극복을 위한 대상이 될 뿐이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적인 악이해는 악의 문제를 종교적 실존의 자각의 문제로써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리상의 문제로 추상화시켰다는 문제점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의문점을 제기하게 된다.
첫째 본래의 완전한 창조에 잘못과 결함과 결핍이 발생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즉 본성상 악의 그늘이 없는 유한적으로 완전한 피조물이 죄를 지어 타락에 이른다는 것은 악이 악 자신을 무에서 창조하는 것과 동등하며 따라서 이때 악은 단순한 결핍이나 비존재(minus-substance)가 아닌 것이다.
둘째 먼 옛날 어느 시점에서 인류는 낙원의 무흠한 상태로 지내던 최초의 인간들로부터 성립되었으며 또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최초의 반역행위에 의해서 이 세상에 병과 죽음과 자연재해 등이 초래되었다는 신화적인 생각은 현대적인 감각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
셋째 하나님은 최초의 두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인류 전체를 벌한다는 생각은 하나님을 불공정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최초의 사람의 죄가 그 후손들에게 유전적으로 계승된다는 이른바 죄의 유전설도 문자 그대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거스틴 스스로도 죄의 유전설과 창조설 사이에서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죄의 유전설은 문자적으로 보다는 “나는 아무래도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자신의 죄성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그 죄성으로부터 벗어남이 매우 어렵다는 죄의 심각성에 대한 자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어거스틴적인 이해일 것이다.

Ⅳ. 이레니우스적 신정론
서구 기독교사상 속에는 이러한 어거스틴적인 악이해와 함께 비록 어거스틴 보다는 그 영향력 면에서 작다고 하더라도 이레니우스(Irenaus 130?-202?)적인 전통이 자리잡고 있다. 이레니우스 역시 최초의 인간으로서 아담과 하와를 믿고 있지만 이 최초의 인간은 완전한 덕을 갖춘 것으로 보지 않고 미숙한 아이와 같은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이(최초의) 인간이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상태에 이르기까지는 아직도 오랜 성장기를 필요로 한다고 본다. 인간은 창조의 과정 속에 있는 존재이며 미래에 약속된 완성의 과정에 이르는 존재이다. 따라서 이것은 과거 지향적인 어거스틴의 악이해와는 달리 합목적론적 미래지향적 신정론을 말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강조하는 어거스틴적인 서방교회와 다른 동방교회의 전통을 대표한다.
이레니우스는 인간이 신의 형상(imago dei)을 지녔다는 기독교적 사실을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상(像, imago)과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과의 유사함(similitudo)을 구분하면서 받아들인다. 상은 이지적인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의 성격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인간이 이성과 자유를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유사함이란 하나님이 우리들 안에 형성하고자 계속 요구하는 궁극적으로 완성된 인간본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초자연적인 은사를 누리게 됨을 의미하는 미래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의 영혼이 성령을 받지 못할 때에는 동물의 본성과 같아져서 비록 그의 외형은 하나님의 상을 소유하고 있지만 하나님과의 유사함을 지니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이 유사함의 상실을 의미한다. 완전한 존재로 지음받은 것이 아니라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인간의 죄는 어거스틴적으로 이해된 것처럼 결정적인 파국적 사건이 아니라 최초의 인간의 미성숙함에서 비롯된 과정적 행위인 것이다. 인간의 창조는 완전한 것이 아니며 계속 발전되도록 창조되었다. 힉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 동물로서 이 지상에 존재하는 한 인간은 「창세기」의 신화에 있는 것처럼 타락한 피조물이라는 것은 주지하는 바 대로이다. 그러나 이 실락원(失樂園)적 상태에 있는 것은 인간이 도덕적 영적 탁월성의 우선 조건에서 뒤처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원래 인간이 그 완전성과는 거리가 먼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창조 과정 가운데에 있는 피조물로서 또 신학에서 말하는 원죄 가운데 있는 존재로서 인간의 본성은 원초적인 재앙의 결과가 아니라 신의 창조적인 계획 가운데 한 단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힉의 말은 인간을 완성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보고 하나님은 인간을 처음에는 율법을 통해서 그 다음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육시킨다고 보는 이레니우스의 주장에 대한 해석인 것이다.

인간은 매일 성장하며…완전을 목표로해서 상승한다. …따라서 인간은 처음 창조된 이후 계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성장한 후 그는 강해져야 하고 계속해서 풍요로와져야 하며 풍요롭게 된 이후에는 계속해서 원초적인 죄로부터 회복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그는 영화롭게 되어야하고 그 때에 비로소 주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서방교회의 어거스틴적인 악이해와 다른 동방교회의 이레니우스적인 악이해의 요체를 접한 셈이다. 어거스틴적인 악이해에서는 인간의 원천적 완전성이 주장되고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완전성에서 이탈했으므로 그 이탈의 책임이 전적으로 인간에게만 있는 반면 이레니우스적인 악이해에서는 인간이 원래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성장을 필요로 하는 미성숙한 상태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불완전한 인간의 죄에 대해서 신 역시 전적으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타락도 이레니우스에 따르면 미성숙한 데서 비롯된 시행착오일 뿐이다. 힉은 이 이레니우스적인 신정론이―비록 그것이 기독교 사상사속에서 소수의 견해에 머물렀다고 해도 어거스틴적인 신정론이 지닌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받아들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보다 인간중심적인 신정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 이레니우스적인 신정론은 우리들에게 위로라기보다는 오히려 도전이다. 이 자연적 질서 가운데에 우리들 자신의 죽음과 역점과 취약함은 결코 아담의 죄에 대한 벌이 아니고 도덕적 책임과 인격적 성장이 거기에서부터 비롯되는 신에 의해 설정된 상황인 것이다. 이 세상은 낙원이 아니고 영혼의 형성의 장이며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곤란한 요구가 여러가지로 부과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선과 악이 싸우고 있는 이 현실세계 속에서 신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성전에 참가하고 있다. 그것은 선에 의한 악의 극복이라는 싸움이며 이 싸움을 통해서 인간은 보다 완전한 상태로 상승한다. 그리고 이 싸움이 한참 진행되는 가운데 전통적으로 우리가 근원이라고 부르는 전기(轉機)가 각 사람에게 찾아온다

구원은 세계가 악으로부터 격리되는 것에 있지 않고 선에 의한 악의 극복이라는 싸움에 참가하는데에 있다. 참전하는 인간은 중립적인 시민보다도 깊은 상처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갑자기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또 마술적으로 모든 악에서 지켜지는 것도 아니며 다만 투쟁에 의해 올바른 자의 편이 되고 최종적으로 승리에 도움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힉은 이러한 신의 전략이 예수의 삶과 죽음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본다. 즉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삶에 일어난 최악의, 그리고 동시에 최선의 것이다. 그 죽음은 인간의 구원이라는 최고선에 봉사하도록 강요된 최고악이다. 그래서 “최선의 타락이 최악이며 최악의 속죄가 최선인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최고악이라는 것은 예수에 이해 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나 우리들을 향해 내려진 하나님의 사랑과 요구를 우리들 인간이 가장 폭력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형태로 거절해 버렸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거절은 힉에 따르면 동시에 우리들 자신의 본성 속에 숨어있는 최고의 가능성을 거절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모습을 예수에 의해서 보기 때문이다. 힉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래서 “커다란 악으로부터 커다란 괴로움에 의해 초래된 하나의 커다란 선”이라고 해석하면서 이 커다란 괴로움이 악과 선의 경계를 긋는 참여의 차원임을 암시한다. 이 세상은 이 커다란 괴로움에 의해서 영혼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이고 시험대인 것이다.

Ⅴ. 두 전통의 비교
기독교사상사 속에서 중요한 두개의 흐름을 형성하였던 어거스틴과 이레니우스의 신정론은 비록 어거스틴적 해석이 다수의 의견을 형성해왔지만 각각 그 강조점을 달리하면서 이어져내려왔다. 종교철학자 존 힉은 위의 두 경향 가운데 이레니우스 쪽이 더 합리적인 악이해라고 보면서 양자를 비교한다. 우리는 이 비교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서 결론에 도달해보고자 한다.
첫째 힉은 어거스틴적인 신정론을 비판하는데―이에 대해서는 앞서서 어거스틴을 거론하면서 잠깐 언급했었다.―그 까닭은 하나님이 악에 대해서 일체의 책임도 지지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참으로 창조주이고 온 세상의 섭리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이레니우스적인 신정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세상의 악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최종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힉은 악은 비존재라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악=비존재'라는 명제는 경험적인 것이 아니고 신론과 창조론에 근거된 형이상학적인 진술일 뿐이다.
셋째 그러나 힉은 어거스틴과 이레니우스 전통을 모두 신적인 전능함에 대해서 어떤 논리적인 제한이 존재하지만 이 논리적인 제약은 신의 능력에 대해서 여하한 실제적인 제한도 가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넷째 세계 속에 존재하는 악의 현실성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어거스틴이 인간의 타락이라는 과거에 거슬러 올라가는 반면 이레니우스는 시간과 역사를 통해서 선을 교육시키는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설명한다.
다섯째 어거스틴과 이레니우스는 모두 우주적 완전성에 대한 신념을 지니고 있다. 다만 전자는 타락 이전의 창조에서 그것을 보고 후자는 창조의 종말론적 완성에서 그것을 찾는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Ⅵ. 닫는말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사상사 속에서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외된 두개의 주요흐름인 어거스틴적 신정론과 이레니우스적 신정론의 요지를 살펴보았다. 양자는 모두 하나님의 전능성과 선함 하나님의 피조물인 이 세계가 가려야 할 완전성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악을 모순없이 해결하려는 신앙적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힉이 말하고 있듯이 이레니우스적인 신정론이 더 합목적이며 인간중심적이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에서 정통적 위치를 차지하여왔던 어거스틴적 전통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악의 문제에 대한 논구는 기독교 신학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중요한 이슈가 된다. 그래서 악의 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라이프니쯔 칸트 헤켈 등의 신정론적 견해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되나 이것은 이 글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다.
악의 문제가 심각한 종교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현실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것이 비록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다룬다고 하더라도 그 문제의 실존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 한 마디로 말해서 총체적인 인간적 차원에서 논의되지 않으면 안된다. 앞에서도 말하였던 것처럼 악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기주장 교만임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구조적 악의 차원에서도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악의 문제는 인간이 처한 가장 현실적인 문제인 것이다.
이레니우스적인 신정론이 우리에게 호소력을 지니는 것은 바로 그것이 인간이 처한 현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능동적으로 그것에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에 있다. 이레니우스적 전통에 따르면 비록 인간의 타락이라는 어두운 심연이 지닌 심각성이 상대화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과정적인 존재로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현실적인 악과의 대항이야말로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로 보게 해주는 것이다.
고통이나 병 재난 불의한 일 죄책 등은 그 자체로 선이 아님은 물론이려니와 존재할 수 없는 비존재도 아니며 또 자동적으로 선한 것으로 바뀌지도 않는다. 그 악을 선으로 만드는 데에는 힉이 말하고 있듯이 “커다란 괴로움”을 가지고 그 악의 문제를 대상적으로 바라보지 아니하고 자기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행위가 요구된다. 그리고 그 “커다란 괴로움”을 감내하는 데에는 하나님은 무책임한 창조주가 아니고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아버지라는 신뢰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 궁극적 신뢰 신앙이야말로 악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과 인간의 책임의 분리 불가능성을 깨닫게 해주는 요체이다. 하나님의 책임은 악의 존재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을 지니고 있는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 섭리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책임은 인간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종말론적이다. 그리고 이 궁극적 신뢰는 어거스틴적 신정론과 이레니우스적 신정론의 공통적 출발점이자 또 지향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현실적인 악의 문제를 놓고 그것을 요청적인 '영원한 선'을 가지고서 대답하든지(Kant) 또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기독교적 이상인 구원의 문제로 대답하든지 사이에 궁극적 신뢰는 현실적인 악의 문제의 대응하는 출발점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김승철/고려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감신대를 거쳐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부산신학교 역사신학(교리사), 현대신학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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