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살아가며/이런저런생각

한 밤 중의 달리기

by Fragments 2008. 10. 31.

내 기억속에 잊혀지지 않는 장면 중 한 가지는 대학교 3학년때 일어났던 새벽길 달리기였다.
교수님의 컴퓨터를 봐 드릴 일이 있어서 마치고 돌아가는데, 교수님 부부께서 우리 집까지 차로 태워 주셨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교수님께서 돈을 주시려고 꺼내시는 것이었다. 난 겨우 그런 일로 돈을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 얼른 인사를 드리고 우리 집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교수님께서 내게 돈을 전해 주시려고 차 문을 열고 나오시는 것이었다. 나는 황급한 마음에 아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냥 우리 집쪽으로 달렸다. 오직 한가지 생각으로 가득찼다. '저 돈을 받으면 안돼'
슬쩍 뒤를 보니 슬리퍼를 신으신 교수님도 달리고 계셨다. 달리면서 참 난감한 생각이 들었으나 붙잡히면 안되겠다 싶어 우리 집근처까지 거의 500미터 되는 거리를 후다닥 뛰어와 골목으로 숨었다.(지금 생각하면 정말 내가 왜 이랬나 싶다..ㅜㅜ)

교수님이 그 앞쪽에서 이리저리 둘러 보시고 나를 못찾자 다시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았다.  얼마나 뛰었는지, 교수님이나 나나 너무 힘들어서 숨을 헐떡거리는 모습이 생각난다.

지금에 와서는 추억으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땐 정말 그 돈을 안 받는 것이 나의 가장 우선순위였다. 그것이 정당한 가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때 교수님께 큰 무례를 저질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수님도 에피소드로 가지고 있을 사건이지만, 내가 그것을 피하는 것은 그야말로 내 입장에서의 최우선이었을뿐, 교수님에겐 적절하지도 예의바르지도 않은 방법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입가에 웃음이 절로 새어나온다.
언제 다시 그런 달리기 할 수 있을까 ㅋㅋ

그런데 오늘 그런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아는 분 댁을 방문해서 컴퓨터와 관련된 몇가지를 도와드리고 나오는데, 우리 시연이 선물주라고 책과 옷을 쇼핑백에 담아 주셨다. 민망하기는 했으나, 감사히 받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흰 봉투가 보였다. 확인해보니 돈이었다. 그렇게 확인한 순간 1층에 도착해 있었고 내 손은 다시 올라가려고 층버튼을 누르려 하고 있었다. 1층에서 잠시 동안 멍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때 바로 앞의 사건이 생각났다. 한 밤중의 달리기 사건. 이것이 과연 내가 하는 최선의 방법일까? 이것은 절대 받을 수 없다며 돌려드리러 바로 올라가는 것이 올바른 행동일까?
물론 내 가치 기준에서는 아직도 올바른 행동이다. 별로 한 것도 없기 때문에 그런 일로 돈을 받는 것은 약간 어색한 일이고 민망한 일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 돈을 받아왔다. 그리고 전화를 드려서 감사를 전했다.

어르신의 마음쓰신 것에 공손히 받는 것도 적절한 예의같아서였다.
내가 그 돈을 드리는 그 사건으로 그분에게 경제적 도움을 드리는 것이 아니기에 그 마음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서로에게 더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전화를 드려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런 부분도 그리 어색한 부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가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어느 한쪽이 거부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다.

여하튼 오늘 한 것도 없는데
시연이 선물도 받고, 가족 식사비도 생겼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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