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가끔 나의 거룩한 주께 대한 충성심으로
주일에 빠지는 교사나 아이들에게
무지막지한 권고(?)를 해왔다.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전도사로서의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기도해야 하고 말씀봐야 하고
술먹지 말아야 하고 담배피지 말아야 하고
주일에 빠지지 말아야 하고
제사지내지 말아야 하고
등등등.....
수없는 권고를 나는 해왔다.
그것이 좋은 길이라고 확신에 차서 그래왔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본질이 아닌 형식을 떠들어대는 입방정맞은 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이 좋아서
그분이 주시는 생명이 좋아서
술을 담배를 멀리했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다른 잡신들에게 고개숙이는 것이 싫어서
제사를 거부했다.
또한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좋아서 주일을 지켰으며
어떻게든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수요예배도, 금요철야도, 새벽기도회도 참석했었다.
내가 그런 정결함을 위하여 헌신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들어온 이후부터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고 내가 그를 믿은후로부터 였지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서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아서
그분의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난 이 두가지를 뒤바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율법과 은혜의 문제...
난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이와 관련된 부분을 읽다가
한없는 슬픔에 치를 떨여야만 했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모습들이
곪은 상처처럼 어찌 손대볼수 없이
추하고 더러웠고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변화시킬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들어가면
그는 자연히 주일을 지키고 싶어할 것이고
술과 담배를 멀리할것이고
정결함을 위해 헌신하고자 할것이다.
나는 그분을 전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강요나 율법주의자로서의 권고를 할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정죄이지 가르침이 아니었다.
은혜가 필요한 것이지 율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친 그리스도인을 위하여..라는 책을 쓴 봅조지는 이런 예를 내게 말해주었다.
우리의 죄로 인해 구원받았고 죄가 많으면 은혜가 크다..은혜로 구원받는 것은 그럼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입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대답은 그에게 이렇게 느껴진다고 했다.
한 거지가 식당 밖에서 쓰레기통을 뒤져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던 식당 주인은 그를 데려다가 앞으로는 그러지 말고
식당안에 들어와서 밥을 줄테니 먹으라고 하였다.
앞으로는 당신 무료로 언제든지 먹어도 좋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거지가
"그래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기 식당 구석에 있는 쓰레기 봉지에서 음식을 먹어도 되지요?" 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상황인것일까?
앞에 놓인 음식을 보고 왜 쓰레기를 찾겠는가!
은혜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앞에 놓인 은혜를 덧입은 우리는 다시금 죄를 짓기 위하여 쓰레기통을 뒤지지는 않은 것이다. 은혜가 그에게 생명으로 다가오기 때문이고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죄를 위하여 살지 않고 주를 위하여 살것이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말했었다.
맞다....
난 그들이 은혜를 경험하도록 인도하는 자이어야 한다.
다시금 그들을 율법으로 돌아가도록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이 불쌍한 자로 하여금
만나는 자들에게
은혜를 경험하게 하소서!
주의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복을 전하게 하소서!
주일에 빠지는 교사나 아이들에게
무지막지한 권고(?)를 해왔다.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전도사로서의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기도해야 하고 말씀봐야 하고
술먹지 말아야 하고 담배피지 말아야 하고
주일에 빠지지 말아야 하고
제사지내지 말아야 하고
등등등.....
수없는 권고를 나는 해왔다.
그것이 좋은 길이라고 확신에 차서 그래왔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본질이 아닌 형식을 떠들어대는 입방정맞은 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이 좋아서
그분이 주시는 생명이 좋아서
술을 담배를 멀리했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다른 잡신들에게 고개숙이는 것이 싫어서
제사를 거부했다.
또한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좋아서 주일을 지켰으며
어떻게든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수요예배도, 금요철야도, 새벽기도회도 참석했었다.
내가 그런 정결함을 위하여 헌신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들어온 이후부터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고 내가 그를 믿은후로부터 였지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서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아서
그분의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난 이 두가지를 뒤바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율법과 은혜의 문제...
난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이와 관련된 부분을 읽다가
한없는 슬픔에 치를 떨여야만 했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모습들이
곪은 상처처럼 어찌 손대볼수 없이
추하고 더러웠고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변화시킬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들어가면
그는 자연히 주일을 지키고 싶어할 것이고
술과 담배를 멀리할것이고
정결함을 위해 헌신하고자 할것이다.
나는 그분을 전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강요나 율법주의자로서의 권고를 할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정죄이지 가르침이 아니었다.
은혜가 필요한 것이지 율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친 그리스도인을 위하여..라는 책을 쓴 봅조지는 이런 예를 내게 말해주었다.
우리의 죄로 인해 구원받았고 죄가 많으면 은혜가 크다..은혜로 구원받는 것은 그럼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입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대답은 그에게 이렇게 느껴진다고 했다.
한 거지가 식당 밖에서 쓰레기통을 뒤져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던 식당 주인은 그를 데려다가 앞으로는 그러지 말고
식당안에 들어와서 밥을 줄테니 먹으라고 하였다.
앞으로는 당신 무료로 언제든지 먹어도 좋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거지가
"그래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기 식당 구석에 있는 쓰레기 봉지에서 음식을 먹어도 되지요?" 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상황인것일까?
앞에 놓인 음식을 보고 왜 쓰레기를 찾겠는가!
은혜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앞에 놓인 은혜를 덧입은 우리는 다시금 죄를 짓기 위하여 쓰레기통을 뒤지지는 않은 것이다. 은혜가 그에게 생명으로 다가오기 때문이고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죄를 위하여 살지 않고 주를 위하여 살것이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말했었다.
맞다....
난 그들이 은혜를 경험하도록 인도하는 자이어야 한다.
다시금 그들을 율법으로 돌아가도록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이 불쌍한 자로 하여금
만나는 자들에게
은혜를 경험하게 하소서!
주의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복을 전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