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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Faith/신앙글 모음

하나님의 감동시킨 사람들의 기도

by 길목 2002. 11. 4.
이동원 목사


1. 아브라함의 기도 (창세기 18장 22절~33절)

◎참된 기도는 내가 누구인가 하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고백하고 있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이것이 아브라함의 자기인식이다. 철저한 피조물성의 인식. 이것을 안다면 주 앞에 겸비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기도가 출발하는 자리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의 기대와 요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도이다.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할 것이 아니니이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에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의로 그 땅에 역사하시도록 기도하고 있다. 그는 조카 롯이 살고 있던 그 도시, 그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의와 자비가 부어지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할 때 자신의 소명을 기억하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는 매우 중요한 삶의 소명을 받았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는 존재로 살라는 것이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이것은 아브라함 가문의 전통이 되었다. 야곱의 인생을 보면 이런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
“라반이 그(야곱)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요셉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그가 속한 지역, 사회, 국가, 세계를 위해 복 주시기를 구할 뿐 아니라, 역시 하나님 자신의 1차적 기대와 요구이신 자비와 긍휼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을 볼 수 있다.

2. 모세의 기도 (출애굽기 33장 12절~16절)

◎하나님과의 동행을 소망한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고백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말씀과 같이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하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의거하여 그들은 그들이 원하던 결과를 얻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약속을 통해 얻게 될 일의 결과보다는 그분과의 동행 자체가 중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임재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도 바꾸게 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던 하나님의 근엄하신 선포가 모세의 기도로 인해 이렇게 바뀌게 되었다. 우리가 울며 기도할 때 마음도 바꾸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믿고 기도할 수 있다.

3. 한나의 기도 (사무엘상 1장 10절~18절)

◎하나님 앞에서 숨김없이 심정을 토하는 기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시편 기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본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시32:3)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시62:8)
한나는 마음이 괴로울 때 하나님을 찾아와 토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또한 한나는 오래 기도했다. 마음 속에 있는 것이 다 주님 앞에 쏟아져 나올 때까지, 그리고 그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주님 앞에 다 드러날 때까지 기도했다. 이런 기도를 드리고 나면 치료가 시작되며, 기적이 시작된다.

◎내 필요와 하나님의 필요를 연결할 줄 알았다.
대부분 인생에서 경험하는 고통은 사실 욕심과 관련이 된다. 내 욕심이 충족되지 못해서, 내 욕심대로 되지 않아서 좌절하고 고통받는다. 우리의 기도가 욕심의 표현이고 그 욕심만 증가시키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필요는 위한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하는가? 물론 그렇

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주님 앞에 아뢸 수 있어야한다. 중요한 것은 내 필요와 욕구를 승화시켜 하나님의 필요와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나는 아들을 얻지 못한 한을 풀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했다. 그러나 그녀의 기도는 정한수 떠놓고 아들을 달라는 그저 자신을 위한 기복적 기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헌신의 기도였다.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쳐 드리겠다는 헌신의 결단이었다.

◎응답을 확신하는 기도를 드려라.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한나에게 임신의 기미가 보였다거나 어떤 응답의 증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한나는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확신했다. 그것은 그가 기도 가운데 응답의 확신을 얻은 것이다. 주님 앞에 기도하고 일어설 때 정말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며 일어설 수 있는 기도를 드려라.
4. 솔로몬의 기도 (열왕기상 3장 4절~15절)

◎사랑에 근거한 지속적인 기도
솔로몬은 결정적인 필요의 순간 혹은 위기의 순간에만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본문에 보면 3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여기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했다’ 를 정확히 옮기면 ‘계속해서 분향했다’, ‘계속해서 예배했다’, ‘계속해서 기도했다’의 뜻이다. 그가 이렇게 계속해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본문에서는 그가 여호와를 사랑했다는 사실로 그것에 답하고 있다. 그는 사랑 때문에 기도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목마르게 한다.

성경은 그가 1,000번제를 드렸다고 했다. 이것은 1,000번의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1,000마리의 제물을 드렸음을 말한다. 무슨 국가 대사나 전쟁을 위해서도 아니고 사랑에 따라 올려진 이 제사에 굉장한 제물들이 주 앞에 바쳐진 것이다. 1,000마리나 되는 제물을 소화해 내는 제사를 드리려면 상당히 여러 날이 필요하다. 솔로몬은 이렇게 몇 날이고 이렇게 계속해서 기도하고 예배했던 것이다.

◎겸손하고 이타적인 기도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솔로몬의 고백을 보면 그는 자신을 종으로 자처할 뿐 아니라, 스스로 작은 아이라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솔로몬의 탁월한 지혜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자기의 무지와 한계를 아는 것, 처신조차 모르는 자라는 고백을 하는 것, 이것을 통해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기도자가 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위한 필요에 앞서 사명을 위한 기도, 남을 위한 이타적인 기도에 자신을 드렸다.

5. 다윗의 기도 (역대상 29장 10절~17절)

◎고난 가운데 장래를 바라는 기도
고대 중국 철학자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소인(小人) 일수록 현재를 생각하고
대인(大人) 일수록 장래를 생각한다”
본문 14절 첫 부분을 보면 “환난 중에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라는 말씀이 있다. 다윗은 아주 어려운 때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고난 가운데서도 가치 있는 꿈을 품을 줄 아는 자였고, 이것을 위해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기도
그는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철저하게 깨달은 자였고, 그가 누리는 모든 삶의 특권이 주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늘 고백하는 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환난 중에도 즐겁게 헌신할 수 있었고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또한 그는 15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임을 알았다. 이러한 인생의 본질 앞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이 짤막한 생애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만큼 인간에게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남기려는 본능적 욕구는 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의 고백은 달랐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그는 자기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자기 인생이 쓰여지기를 소망했다.

6. 이사야의 기도 (이사야서 6장 1절~8절)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 참회의 기도
하나님께 구원의 믿음을 얻을 때, 소명을 받을 때, 그 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신다.
왜냐하면 이런 특별한 기도에는 언제나 우리의 참회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참회는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진정으로 우리 내면에서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거룩한 그 분께 우리의 시선을 맞출 때 우리는 상대적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거기서 자신의 부정을 깨닫게 된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뵙는 순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화로다 망할 나여, 나는 입술이 부정하고 마음이 부정했으며 또 부정한 사람들 속에서 이렇게 부정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거룩한 절대자 앞에 서서 그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드리는 참회의 기도는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소명을 발견하는 자리로 우리를 인도한다.

◎기도는 사역의 준비가 아니라 사역 자체이다.
부름 받은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나를 어디로 보내는가, 즉 누구에게로 파송 받았으며 할 일은 무엇인가를 명확히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파송 받는 대상인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말씀을 대언 하게 하실 대상이 누구인가를 그에게 즉각적으로 보여 주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눈이 감긴 사람들, 귀가 막힌 사람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파송 받을 때 우리에게는 좌절도 있고 장애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사야는 중보 기도를 시작하며 벌써 자신이 말씀을 전해야 할 대상을 가슴에 품기 시작한다. 기도는 사역의 준비가 아니라 사역의 시작인 것이다. 그가 파송 받은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는 순간 영광스런 사역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 주소서”

7. 하박국의 기도 (하박국서 3장 1절~3절, 16절~19절)

◎진노의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기도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불의한 모든 현실, 불의한 모든 대상을 향해 진노하신다. 본문을 보면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선포되자 당황한 하박국 선지자는 기도를 시작한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하박국서 1장에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어찌하여”라는 단어이다. 그는 하나님께 항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3장쯤에 와서는 기도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해 수긍하고 참회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런 고백을 들을 수 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소서.”
이것이 바로 시대가 어두워질 때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내용이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소서”라는 간구를 통해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란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기도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하박국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기도의 진정한 정체를 발견할 수 있다. 기도는 현실 도피가 아닌 것이다. 기도는 현실을 직면하는 것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눈이 없으면 우리는 엎드릴 수 없다. 하박국은 자기 민족에게 들이닥칠 무서운 현실, 하나님의 심판을 직시했다. 그 민족이 경험해야 할 무섭고도 두려운 현실을 직면하고는 와들와들 떨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 마침내 하박국은 두려움을 넘어선다. 기도를 통해 두려움 대신 하나님의 놀라운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소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리라”

◎찬양이 터져 나오는 기도
참된 기도를 드리면 마지막에는 찬양이 터져 나온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하박국의 기도는 골짜기와 같은 어둠에서 시작되었으나,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체험하는 높고 빛나는 언덕을 지나, 마침내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찬양으로 끝맺음하고 있다.
8. 바울의 기도 (에베소서 3장 14절~21절)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기를 구함
“너의 속사람을 능력을 강건하게 하옵시며..”
하나님은 우리 속 사람을 위해 평화도 주시고 안식도 주시고 기쁨도 주시고 거룩함도 주신다.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쏟아지는 선물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감당하려면 먼저 우리의 속사람이 건강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소유할 넉넉하고 풍성한 영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주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의 속사람의 강건을 위한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풍성한 삶, 충만한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속사람의 강건을 위한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기를 구함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여기서 ‘계신다’는 ‘영원히 거한다’, ‘온전히 전체를 다 소유한다’, ‘주인이 되어 거한다’는 의미이다.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내어드리는 것 조차도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충만한 삶을 원한다면 먼저 그리스도가 내 마음을 주장하시기를 구하라.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구함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모든 것이 언제나 그 대상으로 가득차 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도 주님으로 충만하게 된다. 우리의 사역의 대상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도록 기도하라.

9. 예수님의 기도 (요한복음 17장 20절~26절)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기도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앞으로 올 모든 세대를 포함한 기도, 전 인류를 위한 기도를 드리셨다.


◎하나님의 연합을 본받기 위한 기도
“아버지께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성부 성자의 연합은 바로 성도들의 연합의 궁극적인 모델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조직적 연합이 아니라 ‘영적 연합’이다. 우리는 영적 연합보다도 조직적 연합을 구하기에 언제나 실패하고 만다.
조직이나 교파는 그대로 두어도 좋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공통의 신앙 고백을 소유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경험하는 기도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과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진보하고 성숙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 영적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참 아름다운 교제가 있는 곳, 아주 순수한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있는 곳에 들어가면 신앙이 저절로 진보한다. 형제들의 아름다운 격려와 사랑의 나눔 속에서 우리는 영혼이 맑아지고 깨어지고 진보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하나됨의 교제를 사모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됨의 교제가 있는 곳에는 영적 진보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도 나타난다. 우리의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를 담당하기 위한 기도
“나를 사랑하심과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서양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틈이 없다”
이것을 바꿔서 얘기하면 ‘바쁜 꿀벌은 싸울 틈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성도들이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할 일이 없을 때 다툰다. 소명이 있으면 절대로 싸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노인이 되어서도 할 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할 소명을 가지고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소명에 자신을 던지는 기도가 필요하다. 할 일이 있으면 싸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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