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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Society

밀양, 신앙의 근본적인 질문

by 길목 2007. 9. 22.

밀양이란 영화를 보았다. 말로만 들어봤던 그 영화!!!
밀양! Secret Sunshine. 영화의 주제를 잘 드러내는 제목이 아닐수 없다. 아주 훌륭한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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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사건은 약사이신 집사님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본색을 드러낸다고나 할까.
남편을 잃고 혼자 아이만 데리고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도연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 이 집사님은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면서, 저 햇볕 한가운데도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비밀스런 햇볕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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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것에 관심이 없던 전도연은 갑작스런 일을 당한다. 아이가 유괴를 당해 살해된 것이다. 그 일로 큰 충격을 받은 그녀는 큰 슬픔에 잠기게 되고, 그 일로 우연찮게 집사님이 소개해준 부흥회에 참석하게 된다. 그녀는 여기서 큰 체험을 한다. 아마 감독은 신자들의 하나님 체험이라고 하는 것의 공통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가슴속에 응어리 진 것을 목놓아 흐느끼며 우는 행위를 통해서, 그리고 목사님의 안수를 통한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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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부터는 너무나 큰 반전이 일어난다. 전도연이 신실한 신자가 된 것이다. 영화가 왜 이래 할 정도로 너무도 쉽게 변해버린 전도연을 보면서 이후에 무슨 일이 있겠구나 하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전도까지 하며 항상 웃음을 잃지 않던 그녀에게 회의적인 믿음을 갖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자기 아들을 죽인 남자의 딸이 길거리에서 무자비하게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냥 지나친다. 여기서 그녀의 믿음과 그녀안의 내재된 삶이 엇갈리기 시작한다. 영화의 스토리를 이어가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믿음을 가졌다면 살인자의 딸을 사랑할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회의적일 것인가. 그동안 자신의 모습을 온통 거짓으로 생각하게 만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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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황을 지나쳐가다 횡단보도 앞에서 깜짝놀라 차를 멈추는데 하마터면 사람들을 칠 뻔한 사건이 나온다. 거듭 죄송하다는 말에 기분 나빠하는 그 사람들을 통해서 근본적인 자신안의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사람 죽여놓고도 죄송하다면 다인가?"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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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살인한 죄인을 찾아가기로 한다. 죄인을 용서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리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죄송하다는 말을 듣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안의 이질적인 믿음을 용서를 통해서 우월성을 드러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과 함께 가자고 하고 온교회에 그 소식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사건이 등장하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써 고민해봤을 문제를 감독은 예리하게 제기한다.
살인한 그를 용서하겠다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그녀에게 이 살인자는 밝은 미소를 띄며, 자신은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께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았다고 환하게 말한다. 이 장면에 그녀는 너무도 큰 상처를 받는다. 사실 말도 안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를 해줄 사람은 본인인데 자신의 아들이 죽었는데, 왜 그 살인자는 자신의 허락도 없이 용서를 받았다는 말인가.

감독이 진지하게 던지는 이 물음앞에 사실은 성경의 가르침이 이와같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죄 용서는 근본적인 인간의 죄의 본성을 없애주는 것이지, 사람 사이에 행한 죄악은 하나님과의 문제와 동시에 사람사이에서 먼저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남겨두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부정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을 하셨고 '다시는 죄짓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또한 다윗이 살인죄와 간음죄를 저질렀을때 그는 하나님께 회계한 후에도 거기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만 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드려졌다고 거룩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먼저' 사람사이에서 기본을 지켜야 된다는 내용을 많이 말씀하셨다. (고르반 사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두 렢돈의 헌금 비유 등)

이 사건뒤로 그녀는 돌변한다.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한다. 그리고 그의 주 무대는 햇볕이 들지 않는 어둠으로 변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때는, 옷가게의 인터리어가 너무 어둡다고 환하게 바꾸라고까지 했던 그녀였는데, 믿은후에는 도리어 여둠속에서 갇혀지내는 여인이 된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님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을 포함하여 그토록 신실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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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전도했던 약국의 집사님의 남편 장로님을 유혹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이런 자신의 모습을, 장로님의 모습을 '보라고' 말한다. 선을 넘지는 않았지만 장로님은 그날 있는 기도모임에 돌아가서 평소에 하던 기도인도를 하지 않는다. 위선적인 이들의 기도모임을 향해서 그녀는 돌을 던지고 도망간다.

정신병적인 그녀의 모습으로 인해 그녀는 정신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퇴원한다. 그리고 퇴원한 그날 미장원에 들렀다가 살인자의 딸과 마주치게 된다. 그녀는 다시 한번 어쩔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도저히 견딜수 없어 미장원을 박차고 나와 집으로 향한다.
사실 이 살인자의 딸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한 것처럼 이 사건에 대해서 미안해하고 죄송스러워한다. 하지만 이 딸은 품행이 바르지도 못하고 믿음도 없는 아이였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위선적이고 반전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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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집에서 혼자 머리를 깍는다. 그리고 그녀를 늘 곁에서 지켜주던 그리고 믿음을 갖게 된 송강호가 나타난다. 그리고 거울을 들어주는 순간 카메라는 그 옆 은밀하게 비치고 있는 햇빛으로 포커스를 맞춘다.

이 영화는 신앙적인 질문을 던지고 해답은 명쾌하게 주지 않는다. 감히 누가 답을 하겠는가. 유태인 600만명의 무참한 죽음을 가져왔던 아우슈비츠의 질문도 해결되지 못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보고 넘어갈 문제만은 확실하다.
신앙은 교양도 아니고 권세도 아니기에, 언제나 시크릿 선샤인으로 계시는 그분을 인정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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