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베비닥(필명)
우리부부의 별명은 <잉꼬부부>다. 교회에서나 아파트에서 우리를 그렇게 부른다. 우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의 해외 여행에서도 그렇게 불러 주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가정에서 남편을 기다리며 사랑과 정성으로 뒷바라지를 할 수 있는 여인도 아니며, 애타게 남편 돌아올 시간을 기다리며 가슴 설레는 여인도 아니다.
그렇다면 26년의 세월동안 어떻게 이웃들에게 잉꼬부부라는 말을 듣고 살아 왔을까 곰곰 생각해 보았다. 실제로 젊은 부부 중 관심 있는 분은 가정의 행복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물어온다. 나도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은 글로 적으며 그것을 찾아보고 싶다.
우리는 중매로 결혼했다. 첫선으로 양가 부모님들과 함께 만났고 단둘만의 데이트도 못해본 시점인 두 번째 만났을 때 시아버님이 또 따라 나오셨다. 그 날 시아버님은 약혼 날짜를 잡자고 요청을 하셨다. 그리고 친정아버지는 그러자고 하셨다. 신세대 아이들이 이해를 할 것인가? 우리 딸들은 절대 아빠랑 엄마 같은 결혼은 하지 않겠단다. 나 역시 우리들의 결혼 결정은 우습다. 무엇을 믿고 그렇게도 결혼을 쉽게 여겼을까? 그러나 나는 나의 결혼 결정을 강권적인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믿는다.
나는 결혼 전 결혼을 위해 기도했다. 늦게 신앙을 가진 친구들은 내가 미리 결혼을 위해 기도를 했다는 것을 무척 부러워한다. 자기들도 결혼 전에 미리 기도했으면 보다 더 행복한 가정을 꾸렸을 텐데 라며 부러워한다.
나의 결혼에 대한 기도는 세 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째는, 나 자신이 의사이기 때문에 여의사가 이해를 받으며 그나마 바쁜 삶에서 조금은 덜 피곤하게 결혼 생활하기 위해선 남편도 의사여야 했다.
그 다음, 우리 가정은 기독교 초창기 쪽복음 시절부터 믿어온 대대로 기독교 가정인 데다 큰외삼촌과 외사촌 오빠는 순교를 하셨던 순교자의 가정이다. 나는 순교자를 가진, 현재까지 6대째의 기독교 가정이라는 데에 항상 자부심을 갖고있다. 그런 터에 신앙에 있어서는 손해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남편감의 또 하나의 조건은 나와 같은 장로님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었으면 했다. 기도대로 남편의 가계도 나와 꼭 같은 6대의 기독교 가정이다.
세 번째는, 부모님의 축복 받는 결혼이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기도하던 두 가지 조건에 맞아 첫 선을 보았던 것이고 두 번째 만남에서 부모님들이 좋다고 결정한 결혼은 바로 내가 원하던 부모님의 축복 받는 결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나의 결혼조건이 완벽했기에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지금도 내가 내걸었던 결혼조건 세 가지를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너무도 어리석은 결혼조건이었다. 장로님 아들 중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 너무도 많으며, 의사들 중 아내가 의사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의사도 수없이 많다. 그리고 부모님의 축복 받는 결혼이라고 다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설픈 결혼조건으로 결혼을 했음에도 행복한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 가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부부가 같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서로 노력하며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솔직히 요즘 “뭔가 쨍하는 느낌”을 바라는 신세대의 결혼조건을 들으면 속으로 많이 우습다. 과연 그 쨍하는 느낌은 얼마나 갈 것인가? 죽느니 사느니 사랑한다던 부부도 6개월 채 되지 않아 합의 이혼이란 것을 하는 것을 보면 그 쨍하는 느낌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혼하는 연예인들이 신문지상에 발표하는 이혼 이유는 하나같이 “성격차이”란다. 성격차이라면 우리부부만큼 다른 사람들도 없다. 같은 구석은 한 곳도 없다. 나는 우울질의 기본 성격에다 다른 것이 복합된 성격이나, 남편은 다혈질 기본에 다른 것이 가미된 성격이다. 성격만이 다른 것이 아니다. 취향과 체질도 전부 반대다. 나는 추위를 너무 타지만 남편은 어지간한 날씨에도 에어컨을 틀어야 한다. 여름에는 에어컨 없이는 잘 수 없는 남편 때문에 나는 한여름에도 한겨울 이불을 덮고 잔다. 남편이 꼼꼼하게 챙기는 구석은 나는 덜렁 덜렁 넘어간다. 남편이 잘 못하는 분야는 나는 너무 잘한다. 나는 몇 번 본 얼굴도 기억에 없다. 남편은 30년 전 잠시 만난 적 있는 환자 보호자를 택시기사로 만났을 때 정확하게 알아보았다. 남편은 한번 간 길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 반면, 나는 완전 길치이다.
나는 이렇게 나와 다른 남편을 주신 것을 늘 감사하며 산다. 부부는 달라야 서로 보완이 되는 것 같다. 내가 아는 어느 남편은 자기와 꼭 같은 성격의 배우자를 찾기 위해 너무도 오랜 세월을 허비하였다. 그 후 수녀원에서 이상형의 여인을 찾아 결혼했으나 5년을 넘기지 못하고 이혼을 했다. 이혼사유는 자신과 성격이 너무 꼭 같아서 피곤해서 못살겠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어떻게 했을 때 가장 행복했던가를,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많은 젊은 남편들을 위해서, 그래도 다른 여인들보다 오랜 결혼생활의 경험을 가진 여인이 나누고자 한다. 남편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평소 나는 여자로서 내 남편이 나에게 어떻게 해 주었을 때 행복하였던가를 생각하면서 남성 동지들도 ‘아내 행복하게 하기’ 실험을 해 보시기를 바란다.
남편은 늘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 어떤 분이 남편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말하기를 “그 사람은 내가 필요할 때 한번 같이 있어준 적이 없어요”했다. 그러나 내 남편은 퇴근하면 늘 나와 함께 있어 준다. 내가 무엇을 하든 도와준다. 내가 설거지를 하려고 수세미를 들면 곁에서 그릇들을 헹궈 준다. 내가 반찬을 만들면 밑반찬을 놓고 수저를 놓으며 식탁을 준비해 준다. 혹 조금 늦게 퇴근하여 저녁식사가 늦으면 무슨 일을 하고 있다가도 남편은 나의 곁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며 밥을 즐겁게 먹도록 말동무를 해 준다. 나의 곁에 늘 있어 주는 남편으로 인해 행복하다.
내가 다리를 다쳐 기브스를 하고 있던 몇 달 동안 남편은 나를 데려다 주고 출근을 했다. 신호등이 노란 불로 바뀌어 깜빡거릴 때 대개의 사람들은 출근시간에 쫓겨 바쁘게 더 속력을 내어 지나간다. 신호 대기에 걸리지 않고 빨리 지나가기 위해서다. 십중팔구는 그렇다. 그러나 남편은 그때마다 노란 불에 선다. 궁금하게 생각한 나는 노란 불에 지나가도 되는데 왜 서느냐고 물었다. “당신이랑 1초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서.” 나는 내가 사랑 받고 있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남편은 일터에서 신문을 읽고 들어온다. 어느 날 직장의 어느 분과 함께 있다가 마침 신문이 왔기에 그분에게 읽으라고 드렸다. 그가 “아니, 집에 가서 할 일이 없어지니 집에 가서 읽을란다” 말했다. 내 남편에게 물어 보았다. “당신은 왜 집에서 신문을 읽지 않고 일터에서 읽고 들어오시나요?” 남편의 대답이다.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려고!” 나는 또 행복했다.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나타나는 날은 모르고 지나가는 날이 없다. 나의 친구는 머리 모양을 바꿔도 남편이 알아보는 적이 없단다. 남편을 기쁘게 해 주려고 퇴근시간에 맞춰 향수를 뿌리고 맞으면 “휴, 에프킬라 냄새야!” 한다고 불평을 했다. 나의 남편은 헤어스타일이 당장 보기가 싫어도 보기 싫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나중 남편 마음에 더 예쁘다고 생각될 때 “지난번 헤어스타일보다 지금이 더 예쁘다”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나는 지난번 헤어스타일이 보기 싫었구나 라는 것을 짐작한다. 나의 마음 다치지 않으려는 남편의 배려에 난 행복하다.
남편은 나에게 존댓말을 쓴다. 대개의 부부가 타인이 보는 앞에서는 존댓말을 쓰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러나 남편은 단둘이서만 있을 때나 타인과 함께 있을 때나 항상 내게 존댓말을 쓴다. 우리가 사는 곳이 경상도인지라 많은 남편들이 그런 모습을 때로 놀릴 때가 있다. 그래서 타인과 함께 있을 때 미안해하며 오히려 말끝을 흐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남편은 언제나 분명하게 내게 존댓말을 쓴다. 남편의 아내에 대한 존경의 의미라 생각되어 행복하다.
교회에서 우리는, 내가 찬양대석에서 연습을 하거나 남편 당회가 있어 따로 떨어져야 하는 때가 아니면 항상 같은 좌석에 나란히 앉아 예배를 드린다. 어느 집사님 부부가 교회 문 앞까지는 함께 와서 예배당 안에서는 떨어져서 앉는 것을 보면서 물었다. “집사님, 왜 따로 떨어져 앉으세요?” 그가 “집에서도 함께 있느라 지겨운데 교회에까지 와서 시집살이 할 거 뭐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때 부부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더 행복해 하는 부부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놀라웠다.
찬양대석에서 예배드리는 날, 나는 남편이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는지 궁금하다. 예배 시작 전 교인석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본다. 그이가 저 멀리 뒷좌석에서 ‘나 여기 있노라’는 표시로 벌떡 일어선다. 떨어져 있어도 나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 가져 주기에 때맞춰 일어설 수 있는 것이라 느껴져 행복하다.
때때로 내가 잠꼬대를 한단다. 난 이것을 결혼 후 20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타인을 통해 알았다. 학회를 갔는데 같은 호텔 방을 쓴 레지던트가 이야기를 해 줬다. “과장님, 꼭 생시같이 잠꼬대를 하시대요.” 어머나! 내려와서 남편에게 물었다. “나 잠꼬대 한다면서요?” 그렇단다. “그렇다면 왜 말하지 않았어요?” 혹시 잠꼬대 때문에 아내가 신경 쓸까 말하지 않고 배려하는 남편이 있어 행복하다.
바쁜 아내로 인해 아내 없이 시댁에 가는 날은 자신의 잡비를 어머니께 드리고 어머니 좋아하시는 것들을 사 가지고 가서는 “난이 엄마가 어머니께 드리라고 했어요”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무척이나 좋아하신다. 비록 때로는 거짓말이 되기도 하지만 고부간에 중간역할을 잘해주는 남편이 있어 난 행복하다.
내게 달란트(재능)가 있다고 느껴지는 분야는 끝까지 그 달란트를 개발하도록 뒷바라지를 해 준다. 그래서 나는 오르간도, 플륫도, 바이올린도, 요리도, 수영도, 꽃꽂이도, 성악도 배웠다. 아내가 없어 불편하다는 것보다 아내가 있는 날을 감사하며 사는 남편이 있음에 행복하다.
남편은 늘 아내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작은 칭찬꺼리도 찾아 칭찬해 준다. 나는 남편 앞에만 있으면 세계 최고의 여인이 된다. 실제 나의 의견은 무엇이나 존중해준다. 매사에 결정하기 전에는 나의 의견을 꼭 물어준다. 존중받는다는 느낌에 나는 행복하다.
외국을 나갈 일이 있으면 우린 항상 같이 간다. 외국 나가서 색다른 일이나 좋은 풍경을 바라볼 때 서로 생각날까 해서다. 혹시 나 혼자 국내 학회나 출장을 가게 되는 때는 꼭 비행기가 목적지까지 잘 도착했는지 확인을 한다. 정확히 몇 시에 도착을 했는지까지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남편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나만을 사랑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일부러 믿으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 이도 있다지만 나는 누가 어떤 말을 해도 내 남편은 나만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다.
어느 날 남편의 휴대폰에 문자가 들어왔단다. 딸이 확인을 했다. <자기, 나야, 지금 어디 있어?> 나는 “잘못 들어온 문자!”라며 웃었다. 딸은 “엄마, 어떻게 알아요?”했으나 나는 내 남편이 휴대폰 문자 확인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인 것을 알고 있으며, 또 설령 문자 확인을 할 줄 안다 할지라도 그런 문자를 줄 만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다.
장인 장모님에게는 자신의 부모님에게처럼 잘 한다. 장모님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는 변비가 있었다. 자주 변비약을 드시며 변을 보셨다. 변을 보시는 날은 기저귀가 필요했다. 그이는 우리 친정동네의 기저귀는 질이 좋지 않다며 돌아가시는 날까지 꼬박 꼬박 기저귀를 사서 멀리까지 택배로 부쳐 드렸다. 장인 장모님께 드리는 잡비는 사위가 드린다. 나의 사랑하는 부모를 사랑해 주는 남편으로 인해 나는 행복하다.
아내가 고민꺼리가 있으면 남편이 더 고민을 한다. 내 나름대로 깊이 기도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고 기도실에서 나오면 남편은 아직도 나의 걱정꺼리를 들고 고민을 하고 있다. 비록 거꾸로 내가 다시 남편을 위로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남편 땜에 행복하다.
남편은 잘못했다는 말을 참 잘 한다. 나는 어릴 때 어머니께 “잘못했어요”라는 말을 못해 7남매 중 유일하게 돼지우리에 던져질 뻔했던 고집쟁이었다. 그러던 내가 결혼을 하니 남편은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잘못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26년의 세월을 함께 살아오는 중 나도 모르게 어느 날부턴가 나 또한 “미안하다. 잘못했다” 소리를 하고 있었다. 좋은 습관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글이 길어져 남편의 아내 사랑을 전부 못 옮기는 것이 유감이다. 그리하여 이만 물러가노라. 아무쪼록 <해와달> 남성 독자들이여! 여인들을 행복하게 해 줄 귀한 방법을 배워 행복한 가정을 만드시길 소원하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아내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으면 수천 가지 방법을 실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이까?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으로! ♣
해와달 홈페이지에서 옮겨왔습니다...^.^
베비닥(필명)
우리부부의 별명은 <잉꼬부부>다. 교회에서나 아파트에서 우리를 그렇게 부른다. 우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의 해외 여행에서도 그렇게 불러 주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가정에서 남편을 기다리며 사랑과 정성으로 뒷바라지를 할 수 있는 여인도 아니며, 애타게 남편 돌아올 시간을 기다리며 가슴 설레는 여인도 아니다.
그렇다면 26년의 세월동안 어떻게 이웃들에게 잉꼬부부라는 말을 듣고 살아 왔을까 곰곰 생각해 보았다. 실제로 젊은 부부 중 관심 있는 분은 가정의 행복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물어온다. 나도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은 글로 적으며 그것을 찾아보고 싶다.
우리는 중매로 결혼했다. 첫선으로 양가 부모님들과 함께 만났고 단둘만의 데이트도 못해본 시점인 두 번째 만났을 때 시아버님이 또 따라 나오셨다. 그 날 시아버님은 약혼 날짜를 잡자고 요청을 하셨다. 그리고 친정아버지는 그러자고 하셨다. 신세대 아이들이 이해를 할 것인가? 우리 딸들은 절대 아빠랑 엄마 같은 결혼은 하지 않겠단다. 나 역시 우리들의 결혼 결정은 우습다. 무엇을 믿고 그렇게도 결혼을 쉽게 여겼을까? 그러나 나는 나의 결혼 결정을 강권적인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믿는다.
나는 결혼 전 결혼을 위해 기도했다. 늦게 신앙을 가진 친구들은 내가 미리 결혼을 위해 기도를 했다는 것을 무척 부러워한다. 자기들도 결혼 전에 미리 기도했으면 보다 더 행복한 가정을 꾸렸을 텐데 라며 부러워한다.
나의 결혼에 대한 기도는 세 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째는, 나 자신이 의사이기 때문에 여의사가 이해를 받으며 그나마 바쁜 삶에서 조금은 덜 피곤하게 결혼 생활하기 위해선 남편도 의사여야 했다.
그 다음, 우리 가정은 기독교 초창기 쪽복음 시절부터 믿어온 대대로 기독교 가정인 데다 큰외삼촌과 외사촌 오빠는 순교를 하셨던 순교자의 가정이다. 나는 순교자를 가진, 현재까지 6대째의 기독교 가정이라는 데에 항상 자부심을 갖고있다. 그런 터에 신앙에 있어서는 손해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남편감의 또 하나의 조건은 나와 같은 장로님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었으면 했다. 기도대로 남편의 가계도 나와 꼭 같은 6대의 기독교 가정이다.
세 번째는, 부모님의 축복 받는 결혼이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기도하던 두 가지 조건에 맞아 첫 선을 보았던 것이고 두 번째 만남에서 부모님들이 좋다고 결정한 결혼은 바로 내가 원하던 부모님의 축복 받는 결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나의 결혼조건이 완벽했기에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지금도 내가 내걸었던 결혼조건 세 가지를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너무도 어리석은 결혼조건이었다. 장로님 아들 중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 너무도 많으며, 의사들 중 아내가 의사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의사도 수없이 많다. 그리고 부모님의 축복 받는 결혼이라고 다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설픈 결혼조건으로 결혼을 했음에도 행복한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 가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부부가 같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서로 노력하며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솔직히 요즘 “뭔가 쨍하는 느낌”을 바라는 신세대의 결혼조건을 들으면 속으로 많이 우습다. 과연 그 쨍하는 느낌은 얼마나 갈 것인가? 죽느니 사느니 사랑한다던 부부도 6개월 채 되지 않아 합의 이혼이란 것을 하는 것을 보면 그 쨍하는 느낌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혼하는 연예인들이 신문지상에 발표하는 이혼 이유는 하나같이 “성격차이”란다. 성격차이라면 우리부부만큼 다른 사람들도 없다. 같은 구석은 한 곳도 없다. 나는 우울질의 기본 성격에다 다른 것이 복합된 성격이나, 남편은 다혈질 기본에 다른 것이 가미된 성격이다. 성격만이 다른 것이 아니다. 취향과 체질도 전부 반대다. 나는 추위를 너무 타지만 남편은 어지간한 날씨에도 에어컨을 틀어야 한다. 여름에는 에어컨 없이는 잘 수 없는 남편 때문에 나는 한여름에도 한겨울 이불을 덮고 잔다. 남편이 꼼꼼하게 챙기는 구석은 나는 덜렁 덜렁 넘어간다. 남편이 잘 못하는 분야는 나는 너무 잘한다. 나는 몇 번 본 얼굴도 기억에 없다. 남편은 30년 전 잠시 만난 적 있는 환자 보호자를 택시기사로 만났을 때 정확하게 알아보았다. 남편은 한번 간 길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 반면, 나는 완전 길치이다.
나는 이렇게 나와 다른 남편을 주신 것을 늘 감사하며 산다. 부부는 달라야 서로 보완이 되는 것 같다. 내가 아는 어느 남편은 자기와 꼭 같은 성격의 배우자를 찾기 위해 너무도 오랜 세월을 허비하였다. 그 후 수녀원에서 이상형의 여인을 찾아 결혼했으나 5년을 넘기지 못하고 이혼을 했다. 이혼사유는 자신과 성격이 너무 꼭 같아서 피곤해서 못살겠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어떻게 했을 때 가장 행복했던가를,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많은 젊은 남편들을 위해서, 그래도 다른 여인들보다 오랜 결혼생활의 경험을 가진 여인이 나누고자 한다. 남편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평소 나는 여자로서 내 남편이 나에게 어떻게 해 주었을 때 행복하였던가를 생각하면서 남성 동지들도 ‘아내 행복하게 하기’ 실험을 해 보시기를 바란다.
남편은 늘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 어떤 분이 남편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말하기를 “그 사람은 내가 필요할 때 한번 같이 있어준 적이 없어요”했다. 그러나 내 남편은 퇴근하면 늘 나와 함께 있어 준다. 내가 무엇을 하든 도와준다. 내가 설거지를 하려고 수세미를 들면 곁에서 그릇들을 헹궈 준다. 내가 반찬을 만들면 밑반찬을 놓고 수저를 놓으며 식탁을 준비해 준다. 혹 조금 늦게 퇴근하여 저녁식사가 늦으면 무슨 일을 하고 있다가도 남편은 나의 곁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며 밥을 즐겁게 먹도록 말동무를 해 준다. 나의 곁에 늘 있어 주는 남편으로 인해 행복하다.
내가 다리를 다쳐 기브스를 하고 있던 몇 달 동안 남편은 나를 데려다 주고 출근을 했다. 신호등이 노란 불로 바뀌어 깜빡거릴 때 대개의 사람들은 출근시간에 쫓겨 바쁘게 더 속력을 내어 지나간다. 신호 대기에 걸리지 않고 빨리 지나가기 위해서다. 십중팔구는 그렇다. 그러나 남편은 그때마다 노란 불에 선다. 궁금하게 생각한 나는 노란 불에 지나가도 되는데 왜 서느냐고 물었다. “당신이랑 1초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서.” 나는 내가 사랑 받고 있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남편은 일터에서 신문을 읽고 들어온다. 어느 날 직장의 어느 분과 함께 있다가 마침 신문이 왔기에 그분에게 읽으라고 드렸다. 그가 “아니, 집에 가서 할 일이 없어지니 집에 가서 읽을란다” 말했다. 내 남편에게 물어 보았다. “당신은 왜 집에서 신문을 읽지 않고 일터에서 읽고 들어오시나요?” 남편의 대답이다.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려고!” 나는 또 행복했다.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나타나는 날은 모르고 지나가는 날이 없다. 나의 친구는 머리 모양을 바꿔도 남편이 알아보는 적이 없단다. 남편을 기쁘게 해 주려고 퇴근시간에 맞춰 향수를 뿌리고 맞으면 “휴, 에프킬라 냄새야!” 한다고 불평을 했다. 나의 남편은 헤어스타일이 당장 보기가 싫어도 보기 싫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나중 남편 마음에 더 예쁘다고 생각될 때 “지난번 헤어스타일보다 지금이 더 예쁘다”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나는 지난번 헤어스타일이 보기 싫었구나 라는 것을 짐작한다. 나의 마음 다치지 않으려는 남편의 배려에 난 행복하다.
남편은 나에게 존댓말을 쓴다. 대개의 부부가 타인이 보는 앞에서는 존댓말을 쓰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러나 남편은 단둘이서만 있을 때나 타인과 함께 있을 때나 항상 내게 존댓말을 쓴다. 우리가 사는 곳이 경상도인지라 많은 남편들이 그런 모습을 때로 놀릴 때가 있다. 그래서 타인과 함께 있을 때 미안해하며 오히려 말끝을 흐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남편은 언제나 분명하게 내게 존댓말을 쓴다. 남편의 아내에 대한 존경의 의미라 생각되어 행복하다.
교회에서 우리는, 내가 찬양대석에서 연습을 하거나 남편 당회가 있어 따로 떨어져야 하는 때가 아니면 항상 같은 좌석에 나란히 앉아 예배를 드린다. 어느 집사님 부부가 교회 문 앞까지는 함께 와서 예배당 안에서는 떨어져서 앉는 것을 보면서 물었다. “집사님, 왜 따로 떨어져 앉으세요?” 그가 “집에서도 함께 있느라 지겨운데 교회에까지 와서 시집살이 할 거 뭐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때 부부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더 행복해 하는 부부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놀라웠다.
찬양대석에서 예배드리는 날, 나는 남편이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는지 궁금하다. 예배 시작 전 교인석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본다. 그이가 저 멀리 뒷좌석에서 ‘나 여기 있노라’는 표시로 벌떡 일어선다. 떨어져 있어도 나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 가져 주기에 때맞춰 일어설 수 있는 것이라 느껴져 행복하다.
때때로 내가 잠꼬대를 한단다. 난 이것을 결혼 후 20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타인을 통해 알았다. 학회를 갔는데 같은 호텔 방을 쓴 레지던트가 이야기를 해 줬다. “과장님, 꼭 생시같이 잠꼬대를 하시대요.” 어머나! 내려와서 남편에게 물었다. “나 잠꼬대 한다면서요?” 그렇단다. “그렇다면 왜 말하지 않았어요?” 혹시 잠꼬대 때문에 아내가 신경 쓸까 말하지 않고 배려하는 남편이 있어 행복하다.
바쁜 아내로 인해 아내 없이 시댁에 가는 날은 자신의 잡비를 어머니께 드리고 어머니 좋아하시는 것들을 사 가지고 가서는 “난이 엄마가 어머니께 드리라고 했어요”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무척이나 좋아하신다. 비록 때로는 거짓말이 되기도 하지만 고부간에 중간역할을 잘해주는 남편이 있어 난 행복하다.
내게 달란트(재능)가 있다고 느껴지는 분야는 끝까지 그 달란트를 개발하도록 뒷바라지를 해 준다. 그래서 나는 오르간도, 플륫도, 바이올린도, 요리도, 수영도, 꽃꽂이도, 성악도 배웠다. 아내가 없어 불편하다는 것보다 아내가 있는 날을 감사하며 사는 남편이 있음에 행복하다.
남편은 늘 아내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작은 칭찬꺼리도 찾아 칭찬해 준다. 나는 남편 앞에만 있으면 세계 최고의 여인이 된다. 실제 나의 의견은 무엇이나 존중해준다. 매사에 결정하기 전에는 나의 의견을 꼭 물어준다. 존중받는다는 느낌에 나는 행복하다.
외국을 나갈 일이 있으면 우린 항상 같이 간다. 외국 나가서 색다른 일이나 좋은 풍경을 바라볼 때 서로 생각날까 해서다. 혹시 나 혼자 국내 학회나 출장을 가게 되는 때는 꼭 비행기가 목적지까지 잘 도착했는지 확인을 한다. 정확히 몇 시에 도착을 했는지까지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남편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나만을 사랑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일부러 믿으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 이도 있다지만 나는 누가 어떤 말을 해도 내 남편은 나만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다.
어느 날 남편의 휴대폰에 문자가 들어왔단다. 딸이 확인을 했다. <자기, 나야, 지금 어디 있어?> 나는 “잘못 들어온 문자!”라며 웃었다. 딸은 “엄마, 어떻게 알아요?”했으나 나는 내 남편이 휴대폰 문자 확인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인 것을 알고 있으며, 또 설령 문자 확인을 할 줄 안다 할지라도 그런 문자를 줄 만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다.
장인 장모님에게는 자신의 부모님에게처럼 잘 한다. 장모님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는 변비가 있었다. 자주 변비약을 드시며 변을 보셨다. 변을 보시는 날은 기저귀가 필요했다. 그이는 우리 친정동네의 기저귀는 질이 좋지 않다며 돌아가시는 날까지 꼬박 꼬박 기저귀를 사서 멀리까지 택배로 부쳐 드렸다. 장인 장모님께 드리는 잡비는 사위가 드린다. 나의 사랑하는 부모를 사랑해 주는 남편으로 인해 나는 행복하다.
아내가 고민꺼리가 있으면 남편이 더 고민을 한다. 내 나름대로 깊이 기도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고 기도실에서 나오면 남편은 아직도 나의 걱정꺼리를 들고 고민을 하고 있다. 비록 거꾸로 내가 다시 남편을 위로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남편 땜에 행복하다.
남편은 잘못했다는 말을 참 잘 한다. 나는 어릴 때 어머니께 “잘못했어요”라는 말을 못해 7남매 중 유일하게 돼지우리에 던져질 뻔했던 고집쟁이었다. 그러던 내가 결혼을 하니 남편은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잘못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26년의 세월을 함께 살아오는 중 나도 모르게 어느 날부턴가 나 또한 “미안하다. 잘못했다” 소리를 하고 있었다. 좋은 습관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글이 길어져 남편의 아내 사랑을 전부 못 옮기는 것이 유감이다. 그리하여 이만 물러가노라. 아무쪼록 <해와달> 남성 독자들이여! 여인들을 행복하게 해 줄 귀한 방법을 배워 행복한 가정을 만드시길 소원하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아내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으면 수천 가지 방법을 실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이까?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으로! ♣
해와달 홈페이지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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