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프랭크 비욜라는 이런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피상적인데서 현실적으로 고찰하고 분석하는 차원으로 이끌어 올렸다. 그 결과 그가 주장하는 새 술이 담겨질 새 가죽부대의 모습은 초대교회의 모형을 따른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종적인 단일목사직을 대체하는 복수 감독(장로)제도
은사중심의 집교회
상호 권면과 위로 격려하는 횡적 교회
성령이 이끌어가시고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교회
현재의 성직자 중심의 구조에서는 변화를 위한 작은 시도들조차 결국은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하는 그는 현재 효과적으로 시도되어지는 셀교회, 제3의 회복운동들 조차 현재 목회자 중심의 종적인 구조에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 이유는 현재의 교회, 즉 제도권 교회의 모습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삶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겨우 1주일, 1시간 동안 극장영화보다 더 재미없는, 성경과는 상관없는 그들(목사)의 주관적인 윤리기준을 듣다가는 것 만으로는 그들의 신앙을 살찌울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하루 하루 삶을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살아내는 것은 꿈꿀수도 없게 만든다. 초대교회에서와 같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예배를 기대하는 것은 이단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많은 성도들도 그런 시스템에 싫증이 났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원하고 있다.
저자도 그런 충족되지 못하는 신앙생활에 염증을 느꼈을 것이다. 성령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어떤 권위를 받았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그들의 일반적인 모습, 혹은 질 낮은 모습으로 인해, 과연 교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또 사도들에 의해 전해진 방법이라고 믿고 그 방법, 그 모습으로 그리스도가 머리되는, 모든 성도가 참여하고 은사를 사용하는 예배의 모습으로 회복하자고 말하고 있다.
같은 소망을 품게 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견은 단순하게 동의가 되지는 않는다. 이유는 그가 반대자들의 의견이라고 아주 짧게 말하고 넘어가는 그 이유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너무 이상주의적인 반면 그의 대안은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론의 6-7가지의 모습중에 가장 좋은 것 두가지를 선택해서 교회는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은사중심적이고, 그리스도가 머리되는 것을 표방하는 교회론을 선택한 것이다. 교회론의 모태는 다 성경이지만 뚜렷하게 성경에서 우리에게 교회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가장 주요한 근거로 대고 있는 고린도전서 14:26과 히브리서 10:24-25절의 상호위로, 권면, 격려의 성직자 없는 자발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이 그들이 의도한 교회의 모습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워치만 니의 주장만을 단순하게 받아들인것에 불과하다.
신약성경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은 사실상 확정적인 것이기 보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그들이 의도한 것이기보다, 아직 복음이 전해지고 임박한 종말을 대비하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줄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의 공동생활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면서 끝나고 말았지 않았는가. 데살로니가 교회는 임박한 종말을 위해서 일도 그만두고 함께 공동생활을 하다가 사도바울의 걱정스런 충고를 받은 것을 기억해봐도 그렇다.
그 뿐만이 아니다. 초대교회의 그런 집교회 중심의 개방적인 모임은 그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해줄 사도적 권위를 가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교회가 지닌 생명적 특징’을 드러내기 위해서 가정교회로만 모인 것이 아니다. 2세기 중반의 기독교인들의 모임은 집교회를 넘어서 교회와 같은 대성당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고고학적 발굴은 더더욱 저자의 주장을 납득하지 못하게 만든다. 성령께서 그 모임의 인도자가 되시고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셨어도, 그 모임이 그런 형태를 가지게 된 것은 박해라는 특별한 상황(저자가 반대 주장이라고 간단하게 언급하지만 사실상 이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보인다) 때문이었지 그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초대교인들의 집교회 시스템은 그들이 의도한 완벽한 시스템이 아니었다. 사도행전 15장의 내용을 보면, 이방교인들과 유대교인들 중에 할례받는 문제로 분쟁이 생겼는데, 이는 이들 교회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스스로 적용하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서 성령님의 주관아래 몇몇 사항을 결정하여 바울과 실라의 가르침을 받으라고 내려 보내고 있다. 갈3:3에 봐도 이들 공동체가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게’ 되는 오늘날과 같은 불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서로를 격려하고 금전적으로 서로 돕고 있다는 이상적인 모습을 목표로 삼고 있는 저자의 생각과는 달리 초대교회는 돈 쓰는 문제에 있어서 사도바울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기근으로 인해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을 부탁했던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헌신적인 도움이 있었다고 강조할 뿐이지(빌4:15), 오히려 부조하는 문제로 여러 교회로부터 오해를 받은 일도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사도직을 했는지 항변하는 모습을 볼수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복수 감독제도(혹은 장로)도, 성경에서 그리 확정적으로 말해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물론 교회에 여러명의 장로들이 임명되었고, 그들사이의 종적 관계는 없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은 저자가 말하는 순회전도자들의 주 역할이었는데, 그들은 그렇게만 사역을 하지 않고 딤전4:13-16에서 보는바와 같이 교회를 대표하여 성경을 낭독한듯하고, 권하고 가르치는 일도 하였고 모든 장로위에서 사역을 감당할 자로 선택되기도 했었다. 그것이 오히려 오늘날의 목사의 위치와 비슷하지, 딤전5:17절의 가르치는 장로의 역할만으로 한정시켜 목사를 다스리는 장로와 대비시켜 구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그 구절에서도 가르치는 장로들의 위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고 삯을주었으며, 교회사에서 이들은 후에 감독의 역할로 교회를 대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됨도 볼수 있다.
결론적으로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찾고 오늘날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당연한 것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다는 데서 어쩔수 없는 오류로 결말을 맺게 되는 것 같다. 오히려 이상적이기 보다는 처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의 실수와 초기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았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다만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성직중심의 획일적인 예배 시스템은 평신도의 참여를 확대하고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보완되면 좋겠다. 교회 제도를 뜯어고치는 것으로는 대안이 될수 없다고 본다. 교회에서 당회하나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데, 복수의 감독제도만 세운다고 성공할리 없다. 교회는 계속해서 갱신되어 왔고 개혁되어 왔으므로, 저자가 말하는 완벽한 모습은 아니겠지만 시대마다 부족함을 채워온 제자훈련, 셀교회, 은사주의, 성령론 사역, 집교회 운동, 성경통독같은 갱신의 움직임이 계속해서 일어나리라고 보고 현재 교회의 폐단도 극복되리라고 믿는다.
살며 살아가며/쭈의 책읽기
1세기 관계적 교회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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